DONE_IS_BETTER_THAN_PERFECT.

출처 : http://blog.daum.net/ratkilling/3579145
김상훈 기자 rat_killing@yahoo.co.kr


참으로 오랜만에 한국영화에 ‘웰 메이드’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지난 2월에 개봉한<추격자>는 역대 18세 관람가 등급 영화 중에서 <친구><타짜>에 이어 3위의 흥행 성적을 거두었고, 비평 면에서도 관객·평론가 할 것 없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사실 <추격자>는 소재 면에서는 결정적인 흥행요소, 즉 'hook'을 갖고 있지 못한 영화이다. ‘연쇄살인’ ‘추격’ ‘제한된 시간’ 등의 이야깃거리는 이미 많은 영화에서 수없이 애용됐던 테마이고, 고만고만할 퀄리티를 예상하게 하는 것들이다. <추격자>가 투자비를 구하지 못해 제작에 난항을 겪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추격자>가 할리우드 영화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네티즌들은 “굳이 비싼 돈 주고 ‘뻔한 영화’의 판권을 사들이는 이유가 뭐냐”고 비아냥대기도 했었다.

 

평범한 소재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추격자>가 500만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 일등공신으로 '탄탄한 시나리오'를 꼽는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시나리오의 어떤 부분이 좋았냐는 질문에는 좀처럼 답을 하지 못한다. 그저 ‘재밌다’ ‘잘 만들었다’ 는 느낌을 말할 뿐, 딱히 ‘왜 재미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연 <추격자>시나리오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것일까?


설명을 위해, 우선 아래 그림을 봐주길 바란다.


                                                          그림1

                             

화살표가 시작지점을 출발하여 끝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을 영화라고 부른다고 하자. 인물중심이든 사건중심이든, 영화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전개시켜서 결말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시작지점을 출발한 화살표가 수직선A의 형태로, 다시 말해 아무 굴곡 없이 지극히 평탄한 과정을 거쳐 끝 지점까지 도착한다면, 그것은 영화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한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프러포즈를 했는데, 마침 여자도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던 터라 두 사람은 행복하게 결혼에 골인 한다’와 같은 줄거리는 끝지점에 무사히 도착하기는 하지만, 관객에게 아무런 정서적 감흥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작가는 화살표가 끝지점에 쉽게 도달하지 못하도록 이야기를 뒤튼다. 예를 들면 ‘남자에겐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지만,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할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여자의 아버지가 킬러인 남자가 죽여야 할 목표물 이라는 것이다’ 따위로 주인공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이때 화살표는 B와 같이 포물선 형태로 나아간다.


여기서 포물선과 수평선의 거리 차 a를 ‘갈등’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a의 폭이 커질수록, 다시 말해 B보다는 C의 형태가 될 수록 영화는 재밌어 진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화살표는 반드시 도착지점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 그림을 보자.


                                                           그림2


그림에서 포물선 D는 다른 것들보다 큰 폭의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끝지점으로 향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 버렸다. 즉, 갈등을 벌려놓기만 하고 수습은 하지 못한 채 영화가 끝나는 것이다. 예컨대, <춘향전>에서 변사또가 춘향이에서 '수청을 들겠느냐?'고 묻는 순간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고 생각해보라. 관객들은 아마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 이런 것도 역시 영화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작가는 갈등을 만들 때 그 해결책도 반드시 마련해 놓아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이야깃거리라도 그 아이템은 포기해야만 한다. 그것이 작가의 창의력을 제한하는 '예산제약'이다.

 

이런 조건들을 상기하며, 다시 <추격자>로 돌아가 보자.

 

<추격자>에서 관객의 바람과 가장 어긋났던 장면이 무엇일까? 아마도 미진이 지영민에게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일 것이다. 많은 관객들이 이 점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착하고 불쌍한 미진이를 왜 죽여야 할까? 더구나 혼자 남게 될 딸까지 있는 여자를······’. 그런데 미진의 죽음은 관객의 마음은 찢어놓았을지언정, 영화의 퀄리티는 한없이 높여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a의 수치가 높을수록 영화는 재밌어진다. 미진이 지영민에게 납치되었다가 탈출하는 플롯은 영화 초반부터 관객에게 엄청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미진은 지영민의 장도리질에 맥없이 죽고 만다. 따라서 미진의 플롯은 갈등을 벌려만 놓고 해결하지 못하는, 그림2에 나타나 있는 포물선 D의 형태로 진행된다.


그런데, 위의 설명대로라면 포물선 D는 관객의 폭동을 유발하는 매우 무책임한 이야기 전개이다. 하지만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관객들도 미진의 죽음을 안타까워만 할 뿐, 영화 전체의 퀄리티에 대해선 매우 만족해한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 부분이 바로 <추격자>의 중요한 비밀이자 트릭이다. 미진의 플롯, 즉, ‘아픈 몸을 이끌고 일을 하러 나갔다가 사이코 연쇄살인마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탈출하지만, 끝내 다시 붙잡혀 처참하게 죽는다’는 이야기는, 분량 상으로는 거의 영화 최후반부 까지 계속되지만, 미진이 죽는 순간에 이것이 영화의 중심 줄거리가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그림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그림3

 

시작점을 출발한 화살표는 미진의 처참한 탈출과정에 몸을 의탁한 채, a가 극대화된 형태의 포물선을 타고 고공비행을 한다. 그리고 미진이 죽는 순간, 화살표는 미진의 이야기와 겹쳐져 있던 엄중호의 추격 플롯으로 환승해 무사히 끝지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제 역할을 다 한 미진의 플롯은 자연스럽게 소멸해 버린다. 이것이 포물선 D와 <추격자>플롯의 차이점이다. 포물선 D는 중심 줄거리를 해결 못하고 표류하는 반면에, <추격자>는 미진의 플롯이라는 '얼굴마담'을 내세워 극의 분위기를 끌어간 후, 중호의 플롯으로 영화를 완벽하게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이처럼 ‘작품 줄거리에는 영향을 주지 않지만, 관객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묶어둠으로써 공포감이나 의문을 자아내게 만드는 영화 구성상의 속임수'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를 ‘맥거핀 효과’라고 부른다.

 

'미진의 플롯'이라는 맥거핀의 사용은 영화에 어떤 효과를 불어 넣었을까?

 

위에서 설명한대로 작가는 수습이 가능한 갈등만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갈등의 폭a를 늘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반드시 수습해야 한다’라는 제약이 사라진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추격자>는 애초에 '미진을 살려야 한다'라는 제약이 없는 조건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작가가 사용할 수 있는 갈등의 폭은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만약 <추격자> 시나리오가 '미진을 살린다'는 조건으로 전개되었다면 영화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것을 따져본다면 맥거핀의 효과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에 대한 분석은 그 경우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영화는 그 속에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장면 하나를 넣고 빼는 것은 단지 그 장면뿐만 아니라 영화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미진이 살아난다는 것은 단지 미진이 피신했던 슈퍼에서의 에피소드가 변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미진이 지영민의 아지트를 무사히 빠져나갔다면, 지영민은 그 사실을 안 순간 그 집에서 도망쳤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화 내내 엄중호가 수집했던 지영민의 은신처에 대한 단서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즉, ‘미진이 살아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고자 했다면, 우리가 극장에서 보았던 <추격자>의 대부분의 장면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거꾸로 얘기한다면, ‘미진이 죽는다'는 설정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훌륭한 이야기 전개가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맥거핀은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당한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영화전체 분위기를 이끌 만큼 강렬해야 하고, 동시에 소멸할 때는 영화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모습을 감춰야 한다. 또한 그것이 소멸한 것이란 사실을 관객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해야 하고, 관객이 자연스럽게 중심 줄거리로 갈아탈 수 있는 ‘다리’도 마련해 놓아야 한다.


<추격자>는 이 조건들을 훌륭히 만족시키는, 고도의 극작술로 이루어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반전 중독’ ‘반전 강박’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뚜렷한 히트작들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한국 스릴러 영화 시장에 <추격자> 스타일의 시나리오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상훈 기자 rat_killing@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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